유럽 대학들, 미국 학문의 위기 속 ‘과학적 망명지’ 자처…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 정부까지 인재 영입 경쟁 본격화
미국 고등교육과 과학연구에 불어닥친 ‘정치적 개입’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이뤄진 과학 및 고등교육 분야의 급격한 예산 삭감과 검열은, 단순한 국내 정책의 변화가 아닌 글로벌 학문 생태계의 균형까지 흔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5년 초, 미국 전역의 주요 과학기관과 대학들을 겨냥한 예산 삭감을 단행했다. NASA, 국립보건원(NIH), 질병통제예방센터(CDC), 국립해양대기청(NOAA) 등이 그 대상이었다. 특히 NOAA는 기후 연구의 중심기관으로, 해당 조치는 미국 내 과학자들 사이에 ‘기후위기 연구에 대한 정치적 보복’으로 해석되었다.
Columbia University와 Johns Hopkins University는 각각 4억 달러, 8억 달러의 연방 자금이 삭감되었고, 이는 곧 2,000여 명의 대규모 해고로 이어졌다. 그뿐 아니라 Columbia에서 연구 중이던 외국 학자 마흐무드 칼릴(Mahmoud Khalil)은 예고 없는 구금과 추방을 당했고, 그린카드 역시 취소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미국 내 외국인 연구자들에게 강력한 경고 신호가 되었고, 미국으로의 유학 및 연구 활동을 꺼리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유럽, 과학 인재 유치의 ‘기회 창출’ 선언
이러한 상황을 발 빠르게 포착한 유럽 대학들과 정부는 ‘과학적 망명(scientific asylum)’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세우며 미국 과학자들을 환영하고 있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이를 ‘슬픈 기회(sad opportunity)’라고 표현하면서도, 자국의 학문적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프랑스 Aix-Marseille 대학교는 ‘Safe Place for Science’라는 이름의 3년짜리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총 1,500만 유로(약 1,600만 달러)의 예산이 배정된 이 프로그램은 기후, 건강,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일하는 미국 과학자 15명을 대상으로 한다. 프로그램 발표 직후 24시간 만에 30건의 신청이 접수되었고, 2주 만에 100건을 돌파했다. Yale, NASA, Stanford 출신 연구자들도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표명했다.
대학교 측은 프랑스 정부와 협력해 이를 국가적 차원의 정책으로 확대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EU 차원의 과학 망명 네트워크 구축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Aix-Marseille 대학교 총장 에릭 베르통(Éric Berton)은 “우리는 연구자들을 유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 겪고 있는 과학의 재앙을 목도하고 단순한 인간적 대응을 한 것뿐이다”라고 밝혔다.
벨기에의 VUB, ‘트럼프의 검열’에 맞선 연구자 포용 선언
벨기에 브뤼셀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 Brussel, VUB) 또한 미국 연구자들을 위한 포스트닥(Postdoc) 12개 자리를 마련하며 유사한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 대학의 총장 얀 단카에르트(Jan Danckaert)는 “미국 학계는 현재 정치와 이념의 간섭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하며, 미국 내 검열과 정치적 탄압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VUB는 1834년 창립 당시부터 국가 또는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학문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다. 이번 조치는 그 창립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사례라 할 수 있다. VUB는 “트럼프 행정부의 공격으로 인해 유럽과 미국 간의 공동 연구 두 건이 취소되었다”며, 이번 인재 영입이 단지 구호 차원이 아닌 자국 학문 생태계 유지에도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파스퇴르 연구소·네덜란드 정부까지 가세
프랑스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는 감염병 및 질병 기원 연구 분야에서 미국 연구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 중이다. 소장 야스민 벨카이드(Yasmine Belkaid)는 “매일같이 프랑스, 유럽 혹은 미국 출신 연구자들로부터 귀국 또는 유럽 이주 요청을 받고 있다”며, “이것은 슬픈 기회지만, 동시에 기회”라고 표현했다.
프랑스 고등교육연구부 장관 필립 밥티스트(Philippe Baptiste)는 유럽 내 연구 기관들에 “미국 출신 인재 유치 방안을 제안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네덜란드 역시 국가 차원의 연구자 유치 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교육부 장관 에포 브루인스(Eppo Bruins)는 “지금은 전 세계 과학 인재가 치열하게 움직이는 시대”라며, 네덜란드가 선두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효과’, 미국 학문 생태계의 국제 경쟁력 위협
미국의 연구개발(R&D) 투자 규모는 2024년 기준 약 1,950억 달러로 세계 최대 수준이다. 그러나 이 중 절반 이상은 국방 관련 연구비이며, 민간 연구 예산의 축소는 장기적으로 미국의 과학 경쟁력 저하를 의미한다.
EU의 연구개발 예산은 현재 7년간 950억 유로가 책정된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이 대표적이지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최근 이 예산을 두 배 이상 증액하라는 권고 보고서를 발표했다. 만약 EU가 연간 250억 유로 정도를 추가 투입할 경우, 미국의 예산 공백을 충분히 대체하며 인재 유치까지 가능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또한, 미국 대학들은 이미 유럽에 29개의 실제 캠퍼스를 운영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가 장기화될 경우, 미국 대학들이 본교의 학문적 자유와 재정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유럽 내 분교 또는 이전을 고려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학문 자유의 새로운 전선: 유럽이 지킨다
유럽의 과학계와 정치권은 현재의 사태를 ‘역사적 전환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에릭 베르통 총장은 “우리가 직면한 이 순간은, 유럽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수호할 책임을 스스로 자각해야 하는 시기다”라고 말하며, 인재 유치보다 더 큰 철학적 배경을 강조했다.
자유와 진실을 지키려는 과학의 목소리가 위협받을 때, 그것을 지켜주는 곳이 진정한 학문의 본산이 된다. 미국이 과거 ‘브레인 게인(brain gain)’의 상징이었다면, 오늘날 그 역할은 유럽으로 이동 중이다. 유럽은 ‘망명’이 아닌 ‘복원’의 공간으로,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실험실이자 정신적 안식처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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