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언제나 느리지만, 영화는 빠르다
한국 사회의 복잡한 권력 구조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부패, 범죄, 그리고 그에 맞선 저항. 이것은 한국 범죄 영화들이 반복해서 그려온 주제다. 그러나 영화 《야당》(2025)은 여기에 하나의 강력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이 복잡한 구조를 설계하는 인물이 바로 범죄자라면?” 그리고 “그 인물이 복수심으로 정의의 판타지를 실현해낸다면?” 이 물음은 곧 영화의 서사를 이끄는 동력이다.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마주했을 때의 첫 인상은 명확하다. 영화는 “조금은 뻔한데, 그 뻔함이 왜 이렇게 통쾌하지?”라는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감정은 단지 전개 방식이나 반전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 속 세계가 우리 현실과 절묘하게 교차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정의감을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복원해주는 일종의 심리적 보상 효과 때문이다.
특히 이 영화는 ‘현실적 판타지’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마약범죄와 검찰, 재벌, 정치권의 유착이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영화의 전개 방식은 마치 복수극 동화를 보는 것처럼 리듬감 있고 경쾌하다. 이런 점에서 영화 《야당》은 <내부자들>의 분노, <베테랑>의 통쾌함, <부당거래>의 아이러니를 한데 버무려 낸 ‘이 시대형 범죄 액션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관객에게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는 점이다. 비록 엄수진이라는 캐릭터가 죽음을 맞이하며 복수의 불씨를 제공하는 서사 구조는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영화는 착한 사람이 살아남고, 악인은 무너지는 이야기를 통해 잠시나마 정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경험하게 해준다. 어차피 이 세계는 영화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만큼은 안도할 수 있다.

야당이라는 ‘기묘한 존재’ — 영화의 소재와 구조
영화 《야당》의 가장 독특한 점은 바로 ‘야당’이라는 존재 자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것이다. 한국어에서 ‘야당’이라는 단어는 보통 정치적 맥락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야당’은 마약 수사 현장에서 브로커 역할을 하며 수사기관과 마약범 사이를 오가는 중개자를 뜻하는 은어다. 법적으로는 단속 대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수사의 실적을 만드는 실무자 역할을 하기에 존재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이 단어의 언어적 이중성은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이강수(강하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가, 검사 구관희(유해진)의 제안을 받고 ‘야당’이 된다. 그는 더는 마약을 만들지도 팔지도 않지만, 마약 밀매망에 침투해 정보를 흘리고, 덫을 놓아 상대를 잡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 일에 ‘소질’을 보인다는 것이다. 대리운전 기사에서 단숨에 전국구 정보 브로커가 되어가는 그의 모습은 일종의 부패한 성공 서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른 피해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야당’이라는 설정은, 기존의 한국 범죄 영화가 보여준 법-범죄-수사-권력의 구도를 재구성하는 장치다. <내부자들>이 언론과 정치권의 부패 고리를 그렸다면, 《야당》은 ‘법 집행 시스템의 그림자’에 해당하는 존재를 전면에 내세운다. 수사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선 언제나 정보를 주는 자가 필요한데, 영화는 이 브로커가 얼마나 전략적으로 조작되고 소비되는지를 정면으로 조명한다.
이 구조는 시사적 메시지와도 직결된다. 실적에 목을 매는 검사와, 권력을 위한 거래에 타협하는 법조계, 그리고 이에 희생되는 개인. 영화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거래와, 그 속에 내재된 잔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주인공 강수가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부패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선을 긋는 장면들도 강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마약은 절대 손대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단지 살아남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인물로 묘사된다. 이 점에서 영화는 그를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정의의 잣대에 복수와 인간적 원칙을 덧입힌 ‘현대판 복수자’로 만들어낸다.
이처럼 ‘야당’이라는 독특한 설정은 영화의 서사를 견인하는 핵심 기둥이다. 익숙한 구조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수사기관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중간자의 폭주가 어떤 파괴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혹은 어떤 해방을 불러오는지를 차분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영화가 단지 통쾌한 범죄극을 넘어서 ‘구조적 비극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서사로 확장되도록 돕는다.
등장인물 분석과 관계의 역학
영화 《야당》은 인물 중심의 서사로 진행된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복수극처럼 보이지만, 주요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관계는 예상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강수, 구관희, 오상재, 그리고 엄수진까지. 네 인물은 각자의 욕망과 생존 전략 속에서 때로는 손을 잡고, 때로는 등을 돌리며, 극의 서스펜스를 끌어올린다.

이강수(강하늘):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야당
이 영화의 중심축은 단연 이강수다. 대리운전 기사로 살아가던 그가 하루아침에 마약 누명을 쓰고, 구관희의 제안을 받아 ‘야당’이 되어 수사에 협력하게 되는 과정은 단지 이야기의 출발점이 아니라, 영화 전체의 도덕적 기준점이기도 하다. 강수는 복수심으로 가득하지만, 마약 자체에는 손대지 않겠다는 윤리적 선을 고수한다. 관객은 이 점에서 그를 응원하게 되고, 이는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복합적인 인물로서의 강수를 성립시킨다.
강하늘의 연기는 이 인물의 복합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특히 중반 이후 마약 중독자로 연기하는 장면에서는 말더듬, 틱 증상 등 섬세한 표현이 돋보인다. 그의 고통은 단지 육체적인 중독의 문제라기보다, 배신과 상실이 빚어낸 내면의 붕괴처럼 그려진다. 이강수는 단지 희생자가 아니다. 그는 전략가이고, 실행자이며, 복수의 화신이다. 그러나 그 중심엔 인간적인 선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영화의 핵심 윤리를 이룬다.
구관희(유해진): 권력을 좇는 검사, 위선과 야망의 이중주
유해진이 연기한 구관희는 이 영화의 가장 입체적인 악역이다. 그는 마약 수사의 실적을 통해 승진을 노리는 검사이며, 이강수를 야당으로 끌어들여 마약판을 설계하는 인물이다. 초반에는 유쾌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강수의 신뢰를 얻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권력에 눈이 멀어 배신을 반복한다.
그의 위선은 영화가 지향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만든 프레임 안에서 범죄와 실적을 조작하는 관희는 ‘이 시대 법조 권력의 축소판’으로 기능한다. 유해진은 그 미묘한 이중성을 눈빛과 표정으로 섬세하게 구현해낸다. 그의 ‘웃는 얼굴에 비수를 숨긴’ 연기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며, 동시에 몰입하게 한다.
오상재(박해준): 소외된 형사의 실체, 정의감과 복수심의 교차
박해준이 맡은 오상재는 영화의 또 다른 균형추다. 그는 정의로운 형사이지만, 수사의 중심에서 늘 밀려난다. 강수와 관희의 야당질에 번번이 당하며, 그 과정에서 그의 분노와 무기력은 점차 복수심으로 바뀐다. 특히 엄수진 사건 이후, 상재는 단순히 정의를 위해 싸우는 인물이 아니라 ‘무너진 정의를 다시 세우려는 자’로 진화한다.
박해준 특유의 ‘땀내 나는’ 형사 연기는 현실성을 부여하며, 관객의 공감을 이끈다. 그는 영웅이 아니며, 완벽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런 불완전함이 그를 더 설득력 있게 만든다. 상재는 관객이 감정적으로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이며, 후반부에서 강수, 수진과 함께 복수를 준비하는 순간은 극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만든다.
엄수진(채원빈): 희생자이자 연대의 상징, 그러나 구조적 한계도
엄수진은 마약에 연루되어 몰락한 여배우이자, 강수와 상재의 복수극에 동참하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그녀는 ‘피해자이자 생존자’라는 이중적 위치를 차지한다. 채원빈은 단순한 조력자에 머물지 않고, 트라우마와 분노를 안고 싸우는 인물로 수진을 그려낸다. 그러나 그녀의 캐릭터는 서사의 말미에서 ‘비극적 소모’로 퇴장하게 된다.
이 부분은 아쉬운 지점이다. 영화 속 세계가 정의 실현의 판타지를 지향한다면, 가장 무고했던 수진이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그 판타지를 완성하는 방식일 수 있었다. 관객은 수진의 죽음을 통해 감정적 전환을 경험하긴 하지만, 동시에 “왜 또 희생되는 쪽은 여성인가?”라는 구조적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점은 영화의 서사적 설계에서 여성 캐릭터의 활용 방식이 여전히 진부하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장르적 쾌감과 현실적 무게감의 공존
영화 《야당》은 범죄 액션 장르로서의 쾌감과, 현실 정치의 무게를 동시에 품고 있는 작품이다. 이 둘이 충돌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영화는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관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카체이싱, 총격전, 근접 격투 장면에 몰입하면서도, 그 이면에 깔린 부패와 거래의 정치를 외면할 수 없게 된다.
리얼한 액션 — ‘과장’보다 ‘긴장’으로 전진하는 연출
황병국 감독은 《야당》에서 ‘보여주는 액션’보다 ‘느끼게 하는 액션’에 집중한다. 이는 무술감독이나 시각효과보다 인물 간의 관계와 감정선을 중심으로 구성된 액션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첫 장면의 차량 추격씬은 단순한 오프닝이 아니라, 인물의 긴장감과 상황의 비정상성을 단숨에 체화시키는 장치다.
특히 중후반부의 맨몸 액션은 그 잔혹함이나 속도감보다도, ‘인물의 처절함’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강수는 마약 중독 상태로 싸우고, 상재는 분노를 안고 대항한다. 이 액션들은 캐릭터의 감정과 동기와 밀착되어 있어, 단순한 스펙터클을 넘어선다.
전개 리듬과 편집 — 도파민 분출의 정석
영화는 약 10분 간격으로 주요 사건을 배치한다. 이른바 ‘도파민 간격 편집’이라고도 불리는 방식으로, 관객은 지루할 틈 없이 감정 곡선을 따라가게 된다. 배신, 반전, 폭로, 충돌 등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영화는 시종일관 빠르고 경쾌하게 달린다.
그러나 이러한 속도감이 서사의 깊이를 다소 희생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몇몇 비평가들은 영화의 빠른 전개가 인물 간 감정 축적이나 사건의 무게를 약화시킨다고 지적한다. 이는 특히 후반부 복수극의 클라이맥스에서 감정적 몰입이 충분히 고조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현실과 장르의 접합점 — 비유이자 재현
<야당>은 장르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한국 사회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다. 마약 유통 경로, 검찰의 실적주의, 권력과의 거래는 결코 영화적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현실을 비유적 이미지로 압축해낸다. 그래서 더 통쾌하고, 그래서 더 씁쓸하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마치 현실 뉴스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정치인의 아들, 고위 검사, 유튜브 여론전, 언론 조작 등은 매우 현실적인 요소다. 영화는 이 현실을 장르적 쾌감으로 포장함으로써, 일종의 감정 해방구를 만들어낸다.
메시지의 다층성: 정치적 판타지와 시대적 풍자
《야당》은 단순한 마약 범죄극이 아니다. 그 안에는 현 시대 한국 사회의 정치 구조와 권력 메커니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숨어 있다. 감독 황병국은 “대한민국 검사는 대통령을 만들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구관희의 대사를 통해,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단 한 줄로 압축한다. 이 대사는 허구가 아니다. 오히려 지난 수년간 현실 속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진 ‘검찰공화국’ 논란과, 검찰의 정치 개입 논쟁을 정조준한다.
영화는 검찰이라는 권력 기관이 어떻게 자신들의 실적과 입지를 위해 민간인을 통제하고, 여론을 조작하며, 심지어는 생명을 도구처럼 활용하는지를 묘사한다. 구관희는 관객에게 말한다. “우리는 정의를 수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적을 생산한다.” 이 냉소적 대사는 단순한 캐릭터의 성격을 넘어서, ‘시스템화된 타락’에 대한 감독의 시선을 반영한다.
이러한 구조는 한국 사회의 대선 국면을 은유적으로 재현한다. 영화 속 권력자들의 게임은 국민이나 피해자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돌아간다. 인기 배우의 마약 연루는 단지 판을 키우기 위한 미끼일 뿐이며, 야당 브로커들의 정보는 ‘필요한 만큼만’ 사용된다. 이 설정은 현실의 대선 후보 가족 비리, 여론 조작, 언론 통제, 검찰 기소권 남용과 자연스레 연결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유튜브’라는 매체의 등장이다. 강수는 마지막 복수의 무기로 유튜브 생중계를 활용한다. 이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장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자, 무기다. 진실을 유튜브로 폭로하고, 권력을 무너뜨리는 이 클라이맥스는 영화가 지닌 ‘현실 기반 판타지’의 결정체다.
한편, 영화의 메시지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인물은 오상재다. 그는 정의를 위해 싸우지만, 권력의 구조 속에서 번번이 패배한다. 그에게 법은 무기이지만, 동시에 족쇄이기도 하다. 결국 상재는 정의감 하나로 버티던 체계를 부정하고, 복수로 전환한다. 이 과정은 관객에게 묻는다. “법이 정의롭지 않다면, 복수는 정당한가?” 영화는 이에 명확히 답하진 않는다. 다만, 그 물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서사와 연출의 빛과 그림자
《야당》은 명확한 기승전결 구조를 갖춘 장르 영화다. 그것은 이 영화가 ‘상업 영화로서의 성공’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영화는 관객을 끌어당기기 위한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 배우의 연기, 리듬감 있는 전개, 클리셰의 활용,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복수와 정의 실현이라는 테마까지.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닌 빛은, 동시에 그림자를 동반한다.
빛: 완성도 높은 상업적 설계
연출 측면에서 황병국 감독은 ‘적절한 포장’의 미학을 구현한다. 사건은 무겁고, 메시지는 날카롭지만, 연출 방식은 가볍고 경쾌하다. 이 대비는 영화의 몰입감을 높인다. 특히 초반의 도입부에서 인물과 배경을 빠르게 정리하고, 주요 사건들을 타이트하게 배열하는 구조는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이어진다.
또한 편집은 매우 계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정이 고조될 때마다 시점을 전환하거나 클로즈업을 활용해 긴장감을 유지하며, 액션 장면에서는 롱테이크 대신 다각도의 컷으로 인물의 불안함과 긴박함을 전달한다. 배경음악도 과하지 않으며, 묵직한 신에서는 음악이 사라지기도 한다. 이 점은 영화의 몰입감을 한층 더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다.
그림자: 여성 캐릭터의 도구화와 에필로그의 부조화
그러나 서사의 설계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여성 캐릭터의 활용 방식이다. 엄수진은 영화 초중반까지만 해도 상당한 비중을 가진 인물처럼 보인다. 마약에 연루되지만 의지를 잃지 않고, 복수를 계획하는 강수와 상재에게 있어 결정적인 연결고리이자 ‘고통의 증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수진은 점차 배경으로 밀려난다. 그녀의 죽음은 클라이맥스를 구성하는 사건이지만, 그 감정적 여운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는다. 그녀가 살아남아 ‘정의가 완성된 세계’를 함께 바라보았더라면, 이 영화는 한층 더 따뜻한 결말로 남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약점은 에필로그다. 복수 이후 강수의 삶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다소 느닷없고, 감정선과 어긋난다. 관객은 ‘끝났구나’라는 만족감에 젖어 있을 때, 갑자기 등장한 잔잔한 마무리는 오히려 정서를 어색하게 만든다. 물론 이는 의도된 서사 구조일 수 있다. 극적인 전투가 끝난 뒤의 고요함, 혹은 ‘일상으로의 복귀’를 강조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급작스럽게 삽입된 톤 변화는 일부 관객에게는 몰입을 해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캐릭터성의 과잉도 변수
《야당》의 인물들은 모두 확고한 캐릭터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몰입감을 주는 동시에 만화적 느낌을 부여한다. 특히 유해진이 연기한 구관희의 캐릭터는 비열하고 냉정하며 야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점은 분명 캐릭터의 개성을 드러내지만, 현실감을 떨어뜨릴 위험도 있다. 관객이 “정말 저런 인간이 현실에 있을까?”라고 느끼는 순간, 영화의 리얼리티는 균열을 일으킨다.
반면 이강수와 오상재는 비교적 현실적 인물로 설계되어 있다. 두 사람은 실패하고, 고통받고, 때로는 도망친다. 그들의 불완전함은 오히려 관객과의 정서적 유대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 대비는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의 결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이야기의 통일성을 다소 약화시키기도 한다.
우리가 이 영화를 보는 이유: ‘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
사실 영화 《야당》은 새롭지 않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복수극을 보아왔다. 권력의 부패, 검경의 야합, 재벌가의 민낯, 고발과 배신, 그리고 정의의 실현이라는 구조는 그 자체로 낯설지 않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관객을 붙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우리 사회가 놓친 ‘정의의 감정’을 회복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뉴스에서, 현실에서 너무 많은 불의와 타협을 목격한다. 가해자가 승리하고, 피해자가 침묵당하는 일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일상이다. 그런 현실 속에서, 《야당》은 정의는 느릴 수는 있어도 결국 실현될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을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판타지를 믿고 싶어 한다.
네가 말한 “현실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라면, 착한 사람이 하나도 죽지 않는 세계였으면”이라는 말은 그 감정의 본질을 정확히 짚었다. 우리는 알고 있다. 현실에선 수진 같은 사람이 가장 먼저 무너지고, 강수 같은 사람은 끝없이 배신당한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그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악을 응징하고, 선이 승리하는 결말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원한 이야기일지 모른다.
강수는 이 판타지의 구현자다. 그는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복수의 엔진이자 정의의 조력자가 되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는 시스템을 정면으로 부수며 법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감정과 진심으로 정의를 실현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정의가 ‘완벽한 복수’가 아니라 ‘정서적 구원’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는 관객을 분노하게 만들지 않고, 통쾌하게 만든다.
오상재의 존재도 중요하다. 그는 우리가 영화 속에서 이입하게 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불의에 당하고, 거기에 분노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의 복수는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이 사회가 이래선 안 된다’는 최소한의 윤리로부터 비롯된다. 결국 관객은 상재를 통해 분노하고, 강수를 통해 해방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정서를, 현실을, 불균형한 세상을, 그리고 그 너머의 이상을. <야당>은 우리가 잠시 기대어 울 수 있는 영화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되찾게 해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익숙한 맛의 영화, 그러나 그 맛이 위로가 될 때
《야당》은 한국 범죄 액션 영화의 모든 클리셰를 응축한 작품이다. 실적주의에 물든 검찰, 권력과 거래하는 정치인, 마약 범죄의 설계자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이용당하다가 다시 칼을 쥔 야당 브로커. 이 모든 설정은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조가 익숙하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이번만큼은 위로가 된다.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감정을 투자하는 이유는, 영화가 보여주는 ‘다른 결말’ 때문이다. 악은 무너지고, 정의는 승리한다. 설사 그것이 가짜일지라도, 그 잠깐의 몰입이 우리의 감정을 해방시킨다. 바로 이것이 영화 《야당》이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핵심이다.
이 영화는 복수를 다루지만 복수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는 시스템을 교란하는 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정의를 조작하는 구조에 맞선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때로는 잔혹하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한 조각의 정의를 쥐어준다. 우리가 그것에 감사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그런 장면을 본 기억이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도 완벽하진 않다. 여전히 여성 캐릭터는 도구적으로 소모되고, 결말의 잔잔한 처리 방식은 감정선의 흐름을 일부 끊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영화는 끝까지 자신의 주제를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착한 사람이 이기는 이야기’에 대한 마지막 기대다.
《야당》은 시대의 기호를 정확히 읽은 영화다. 사회는 분노하고, 사람들은 해방을 원하며, 대중은 더 이상 가해자의 논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욕망을 정확히 캐치한 영화는 통쾌함으로 관객을 휘감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진짜였으면”이라는 바람을 마음에 심어놓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억에 남는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이, 스크린 속에서나마 실현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다. 《야당》은 그 숨구멍이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이 영화의 결말을 떠올리며 ‘아직 정의가 살아있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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