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호라이즌 유럽’ 재가입 요구와 아시아 전략의 부상, 미국 의존 탈피를 향한 전환점
DEI 철폐 정책, 전 세계 연구 협력의 균열을 만들다
2025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복귀한 직후 내린 행정명령은, 단순히 국내 정책의 방향 전환이 아닌 전 세계 학문 생태계에 일대 충격을 안겼다.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을 뜻하는 DEI와 관련된 모든 연방 자금 지원을 중단한다는 행정명령은 미국 대학뿐 아니라 미국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던 해외 대학들에게도 직접적인 타격이 되었다.
특히 오세아니아 지역의 핵심 동맹국인 호주는 그 여파를 직접 체감하고 있다. 호주 내 39개 공립대학을 대표하는 ‘Universities Australia’와 호주과학원(Australian Academy of Science)은 최근, 유럽연합의 최대 연구기금인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에 다시 참여할 것을 호주 정부에 공식 요청했다. 이는 미국의 연구 기금 중단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대체 가능한 파트너십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호라이즌 유럽은 놓쳐서는 안 될 기회”
Universities Australia의 CEO 루크 시히(Luke Sheehy)는 지난 3월 19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호라이즌 유럽은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연구 기금의 원천 중 하나다. 뉴질랜드는 이미 가입했고, 영국조차 브렉시트 이후에도 여전히 협력 중이다. 그런데 호주는 가입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실책이다.”
실제로 호라이즌 유럽은 총 950억 유로(미화 1,028억 달러)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연구지원 프로그램으로, 기후변화, 디지털 전환, 의료혁신, 방위산업 등 광범위한 분야의 다자간 연구를 지원한다. Vicki Thomson, 호주 최고 연구중심 대학 연합체인 Go8(Group of Eight)의 CEO 역시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으며, 왜 지난 정부들이 이 협력에서 제외되기를 선택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기금 중단은 실질적 피해로 이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깨어있는(woke) 학문’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DEI, 기후변화, 성평등 관련 프로젝트들을 연방기금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에 따라 호주에서 미국과 공동연구를 진행하던 프로젝트 상당수가 갑작스레 중단되거나 연기되었고, 실제로 Go8 소속 8개 대학 중 6곳이 연구지원금 중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는 모나시대학교(Monash University), 호주국립대학교(ANU), 시드니대학교,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 서호주대학교 등 호주 내 최고 연구기관들이 포함된다.
Vicki Thomson은 이를 두고 “단순한 외교적 간섭을 넘어선, 전례 없는 이념적 압박”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특히 최근 미국 연방예산관리국(OMB)과 국립과학재단(NSF)은 호주 연구자들에게 36개 항목의 민감한 설문조사를 발송하며, 중국·러시아·이란·쿠바 등으로부터 자금 수령 여부, 연구에 DEI 요소 포함 여부, ‘성별 이데올로기’ 관련 내용 포함 여부 등을 질문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설문은 48시간 이내 응답을 요구하며 협박조의 성격까지 띠고 있었다.
호주의 주요 연구 파트너로 떠오른 유럽과 아시아
이에 대응하여 Go8은 호주 정부와 협력하여 유럽 및 아시아와의 연구 협력 강화를 본격화하고 있다. Go8 의장 마크 스콧(Mark Scott)은 싱가포르와 일본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보호무역주의와 학문 교류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들과의 전략적 연구 파트너십은 더없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싱가포르에서는 양국 간 포괄적 전략 파트너십(CSP)의 10년 비전 협의가 진행되었으며, 인공지능, 기후변화, 에너지 전환, 양자 컴퓨팅, 생명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공동 연구 확대가 논의되었다. 일본 도쿄에서는 ‘연구협력 보호 전략’을 주제로 고위급 대화가 개최되었고, 이 자리에는 Go8 안보위원회 공동의장인 폴 사이먼 전 정보기관장, 릭 버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하여 국가안보와 연결된 연구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국 의존 탈피와 R&D 외교 다변화 전략
호주과학원은 최근 성명을 통해 “미국은 호주의 최대 연구 파트너이지만, 동시에 가장 불확실한 동맹국”이라며, 현재 상황을 일종의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Chennupati Jagadish 호주과학원 회장은 “2024년 한 해 동안 호주와 미국 간 연구자금은 약 3억 8,600만 호주달러(약 2억 5,000만 미화달러)에 달했다”며, “그 중 약 43%가 호주연구위원회(ARC)를 통해 집행되었으나, 이젠 전면적인 재검토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현재 미국에서 탈출하고 있는 연구 인재를 빠르게 흡수할 ‘급행 인재유치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중장기적으로는 호주 연구 외교의 지리적 분산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는 호라이즌 유럽 재가입, 글로벌 과학기술외교기금(Global Science and Technology Diplomacy Fund) 확대, 인도 및 일본과의 관계 심화 등을 언급했다.

호주 정부, 내부 검토와 외교 협상에 착수
제이슨 클레어(Jason Clare) 호주 교육부 장관은 2025년 3월 24일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최소 7개 대학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교육부는 해당 대학들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클레어 장관은 또한 미국 워싱턴 대사관이 미국 당국과 협의 중이라고 덧붙였으며, “이번 상황에 대한 보다 명확한 결과는 4월 하반기쯤 도출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미국이 주도한 연구이므로, 호주 정부가 직접 그 자금을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미국의 결정 자체에 개입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에 따라 호주는 미국의 불확실성에 대비하면서, 유럽 및 아시아와의 자율적인 연구기반 확대에 더 큰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전망된다.
연구자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탈미(脫美)와 이동의 시대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연구자들이 미국 중심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보다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협력 환경을 찾으려 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미국 내 연구자 상당수도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표하며 이탈을 고민하고 있으며, 호주는 이들을 수용할 적임지로 주목받고 있다.
호주 정부는 올해 초 R&D 시스템에 대한 전략적 점검을 독립 전문가 패널에 의뢰했으며, 탈미 전략과 연구자 유치 전략이 주요 과제로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호주가 연구 인프라, 생활환경, 개방성 측면에서 글로벌 인재에게 매우 매력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새로운 국제 연구 질서의 분기점
트럼프 행정부의 DEI 반대 정책은 단순한 미국 내 이념 대립이 아니라, 전 세계 연구 협력 질서의 재편을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다. 호주는 지금 이 변곡점에서 미국 중심의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과학외교 네트워크의 허브가 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외교 전략이나 일회성 정책이 아니라, 장기적인 연구 자율성과 글로벌 파트너십 회복력의 핵심으로 작동할 것이다. 호주 대학들이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세계적인 연구 허브로 도약할 수 있을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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