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고등교육 기관들은 현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발효한 ‘Critical Race Theory(이하 CRT)’ 금지 명령에 대해 거센 반발을 보이고 있다. 이는 대학 내 다양성과 학문의 자유를 저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CRT 금지’ 행정 명령
지난 1월 30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CRT 및 젠더 이론을 포함한 특정 교육 내용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발표했다. 이 명령은 연방 기금을 받는 대학과 K-12 공립학교에서 ‘급진적인 젠더 이론과 CRT를 가르치는 행위’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연방 지원을 중단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CRT를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정책’으로 규정하며, 이 이론이 학생들에게 미국의 시스템이 인종차별적으로 설계되었다는 잘못된 개념을 심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90일 이내에 ‘학교 내 좌편향 교육 근절 전략’을 수립하도록 지시받았다.
CRT란 무엇인가?
CRT는 1970~80년대에 형성된 학문적 프레임워크로, 미국 사회의 법적·제도적 구조 속에 인종차별이 내재되어 있다는 가설을 중심으로 한다. 학자들은 이를 통해 미국의 법과 제도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백인의 지배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는지를 분석한다.
이론의 주요 개념은 다음과 같다:
- 구조적 인종차별(Structural Racism): 인종차별이 단순한 개인의 편견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통해 사회 구조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주장.
- 교차성(Intersectionality): 인종뿐만 아니라 성별, 계급, 성적 지향 등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차별을 형성한다는 개념.
-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인종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특정 집단의 권력 유지에 기여하는 도구로 활용된다는 시각.
CRT는 대학에서 어떻게 적용되는가?
미국 대학에서 CRT는 법학, 사회학, 교육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으며, 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교육과정에 반영된다:
- 법학(Law Schools): CRT는 1980년대 법학 분야에서 발전했으며, 하버드 로스쿨과 같은 명문대에서는 법과 제도가 인종적 불평등을 어떻게 강화하는지를 연구하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 예를 들어, 경찰의 과잉진압과 사법제도의 편향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CRT의 이론이 적용된다.
- 사회과학(Social Sciences): 사회학과 정치학에서는 인종, 권력, 경제적 불평등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데 CRT가 사용된다. 예를 들어, UC 버클리의 사회학과에서는 ‘인종과 사회적 정의’라는 과목을 통해 CRT의 핵심 개념을 교육한다.
- 교육학(Education Studies): 교육학 분야에서는 CRT를 활용하여 학교 시스템 내 인종적 불평등을 연구한다. 예를 들어, 시카고 대학교의 교육정책 프로그램에서는 공립학교 내 학생 성취도 격차가 어떻게 구조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CRT가 적용된다.
- 기업 및 공공 정책(Business & Public Policy):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과 같은 기관에서는 기업 내 다양성과 포용성(DEI) 프로그램에서 CRT의 개념을 활용하여 조직 내 인종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대학과 학계의 반발
미국 대학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에 대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하버드대와 예일대를 포함한 주요 대학들은 성명을 통해 이번 행정 명령이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으며, 정치적 개입이 대학 교육의 독립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대학 교수협회(AAUP) 또한 성명을 통해 “CRT에 대한 공격은 비판적 사고와 학문적 탐구를 억압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대학이 수행해야 할 본질적인 역할과 상충한다”라고 밝혔다.
다양성과 포용성 프로그램 철폐 논란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행정 명령과 더불어 대학 내 ‘다양성과 포용성(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DEI)’ 프로그램을 철폐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그는 DEI 프로그램이 특정 이념을 강요한다고 주장하며, ‘좌파 세력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이에 대해 DEI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대학들은 “DEI 프로그램은 소수자 및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대학에서 동등한 기회를 얻도록 돕기 위한 것”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미시간 대학 관계자는 “DEI 정책이 없다면 유색인종과 소외된 학생들의 교육 기회가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법적 공방과 향후 전망
일부 법률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이 헌법상 학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시민자유연합(ACLU)과 여러 교육 단체들은 행정 명령의 위헌성을 검토 중이며,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을 시사했다.특히, 교육부의 민권국이 대학 내 CRT 교육을 조사하고 연방 기금 중단을 고려하는 조치가 실제로 시행될 경우, 대학과 정부 간의 법적 다툼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서는 연방정부가 대학 교육 과정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위헌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행정 명령은 미국 대학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CRT를 포함한 특정 이념 교육을 금지하는 조치는 대학의 학문적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이 명령이 실제로 대학의 교육 정책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앞으로의 법적 공방과 정책 시행 여부에 달려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번 조치가 학문적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미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