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에서 로마까지, 세상을 품은 교황의 유산
2025년 4월 부활절 월요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선종했다. 라틴아메리카 출신 최초의 교황으로서 가톨릭 교회 안팎에 역사적 전환을 이끈 그의 삶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넘어 전 세계 수억 명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전 세계 신자들과 함께, 우리는 이 특별한 교황의 생애와 가르침을 다시 되새기며, 그가 남긴 유산을 기리고자 한다.

젊은 탱고 댄서에서 교황에 이르기까지: 프란치스코의 뿌리
교황 프란치스코는 1936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였다. 화학자, 탱고 댄서, 나이트클럽 경비원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한 고해성사 중에 사제직의 소명을 느끼고 예수회에 입회한다.
그는 철저한 청빈과 섬김의 정신을 중시하는 예수회 전통을 따르며 사제의 길을 걸었고,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에 임명되었다. 도시 빈민가인 ‘빌라 미세리아’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단순한 교리적 접근이 아닌 공동체적 동행과 사회정의 실현을 우선하는 사목 방식을 정립했다. 이는 훗날 ‘민중의 신학’으로 불리며, 프란치스코의 교황직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뿌리가 되었다.
교황이 된 첫 번째 라틴아메리카 사람, 첫 번째 예수회 출신
2013년, 베네딕토 16세의 퇴위 후 추기경단은 제266대 교황으로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을 선출했다. 그는 교황 이름으로 ‘프란치스코’를 선택했으며, 이는 13세기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이름을 본딴 것으로, 겸손과 평화를 강조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교황궁이 아닌 손님용 숙소에서 거주하며, 화려한 교황 전용차 대신 소형차를 이용했고, 의례적 상징보다 행동과 메시지 중심의 교황직을 실천했다. 그는 교회의 중심이 로마가 아닌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음의 기초로 돌아간 다섯 가지 교훈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한 삶의 메시지는 복잡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음의 본질에 충실했고, 이를 실천으로 전했다. Catholic Review는 그가 남긴 교훈을 다음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 찾아가는 교회: 죄수들의 발을 씻고, 팬데믹 중에도 창밖에서 기도하던 교황의 모습은 그가 언제나 “사람들 가운데 있는 목자”였음을 상기시킨다.
- 기쁨으로 사는 믿음: 프란치스코는 언제나 미소 짓고 있었고,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기쁜 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 사랑받는 존재로 인정하기: 그는 죄보다 인간을 먼저 보았고, 회개의 기회를 열어주는 자비의 해(Year of Mercy)를 선포하며 모두를 포용했다.
- 기도의 공동체 만들기: 그는 취임 첫날부터 우리에게 기도를 청했고, 생의 끝까지 “서로를 위한 기도”를 잊지 않았다.
- 희망의 유산 남기기: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희망을 설파했다. 부활절 기간 선종한 것도 그가 생애 끝까지 희망을 선택했음을 상징한다.
여성 리더십에 문을 연 개혁가
프란치스코는 여성 사제 안수는 불가하다는 교회의 기존 입장을 고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티칸 역사상 가장 많은 여성 지도자를 등용한 교황이었다. 그는 시몬나 브람빌라 수녀를 수도회 담당 국장에, 나탈리 베카르 수녀를 세계주교대의원회 최초 여성 부국장에 임명하는 등, 여성에게 교회 내 행정 권한을 대폭 확대했다.
이러한 개혁은 단지 인사 차원이 아닌, 가톨릭 내 권력 구조의 틀을 재정의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여성들이 설교, 전례, 교회 거버넌스 등에서 더 많은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기후 위기 속 생태 영성의 촉진자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후위기를 다룬 최초의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하며, 생태 정의를 신앙의 핵심으로 선언했다. 그는 생물 다양성 파괴, 기후변화, 불평등을 하나의 문제로 보고, ‘통합 생태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는 국제 기후정상회의(COP)에 앞서 발언하며 전 세계 정책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2023년에는 『찬미하나이다(Laudate Deum)』를 통해 정부들의 미온적 기후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원주민, 청년, 가난한 이들이 기후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전 세계 900개 이상의 가톨릭 기후 단체가 참여한 ‘라우다토 시 운동(Laudato Si’ Movement)’에 영감을 주며 종교 기반 환경 운동을 실질적 글로벌 네트워크로 확장시켰다.
약자와 함께한 정치적 중재자
프란치스코는 중재자의 역할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2014년,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콜롬비아 평화협정의 추진에도 목소리를 보탰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대통령을 바티칸으로 초청해 평화기도를 함께 올리기도 했다. 그는 강경한 반전주의자였으며,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지구 충돌에서도 일관되게 무력 충돌을 반대하고 대화를 촉구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 발언하며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폭력적 시위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성 학대 대응과 비판 사이의 복합적 유산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자 아동 성폭력 문제에 대해 “치명적 침묵의 구조”를 해체하려 했지만, 여전히 보수적 진영과 피해자 단체로부터는 미온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 전 대사인 비가노 대주교는 프란치스코가 학대 신부를 옹호했다며 사임을 요구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는 테오도르 매캐릭 추기경을 파문시켰고, 피해자들과의 직접 만남을 통해 치유의 장을 열었지만, 가톨릭 교회 전체의 구조적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도 공존한다.
그는 10년간 140명이 넘는 비유럽권 추기경을 임명하며 교회의 지리적 중심을 재배치했고, 사도궁 대신 평범한 숙소에서 머무르며 ‘무늬만 겸손한 교황’이 아니라 진짜 ‘서민의 교황’이 되고자 했다.그의 생애는 모순과 갈등, 개혁과 고뇌의 연속이었지만, 그 모든 과정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라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있었다.

다시, 교황 프란치스코를 부르며
프란치스코는 성인(聖人)이기를 스스로 거부했지만, 그를 추모하는 세계 곳곳의 눈물은 그가 ‘가장 인간적인 교황’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는 여전히 ‘거리의 교회’를 꿈꾸었고, ‘열린 성문’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가 세운 변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희망을 기억하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교황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선종 #민중의신학 #라우다토시 #성학대대응 #여성리더십 #기후정의 #가난한이를위한교회 #가톨릭개혁 #평화교황